협객과 기사, 둘 다 검을 들지만 정의를 세우는 방식이 다릅니다
저는 무협을 읽다가 판타지로 넘어갈 때마다 같은 질문에 부딪힙니다. 협객도 검을 들고 기사도 검을 듭니다. 둘 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지키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보면, 두 사람이 "내가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다른 곳에서 옵니다. 협객은 그 순간 자신이 내린 판단으로 옳음을 증명하고, 기사는 예전에 자신이 한 맹세를 지켰는지로 옳음을 증명합니다. 오늘은 이 차이를 한번 정리해 보려 합니다.
협객은 그 자리에서 옳음을 정합니다
무협에서 협(俠)은 미리 정해진 규범이 아니라 매 순간 다시 증명해야 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사조영웅전의 곽정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 아닙니다. 그를 협객으로 만드는 건 무공의 높낮이가 아니라, 눈앞의 사람을 구할지 말지를 그때그때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대로 움직이는 태도입니다. 정파 소속이라 해도 사정은 같습니다. 정파는 협의 도리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그 명분은 문서 한 장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매번 새로운 사건 앞에서 다시 증명해야 하는 현재형의 자격입니다.
기사는 이미 한 말을 지킵니다
서양 판타지의 기사는 반대 방향에서 옳음을 얻습니다. 기사단에 들어가는 순간 서임식에서 서약을 하고, 그날 이후의 행동은 전부 그 서약에 비추어 평가받습니다. 무엇을 섬기고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미리 선언해 둔 다음, 이후의 삶은 그 선언을 지키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기사의 옳음은 과거형입니다 — 지금 무엇을 했느냐보다 예전에 한 말을 어겼는지 안 어겼는지가 먼저 물어집니다.
규칙을 깼을 때, 두 세계는 정반대로 반응합니다
이 차이는 규칙을 어기는 장면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얼음과 불의 노래의 존 스노우는 나이트워치의 사령관이 되고 나서, 대원들이 적으로만 여기던 야인들을 장벽 안으로 들이는 결정을 내립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판단이었지만, 그가 지키기로 맹세한 중립을 스스로 깬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결과가 옳았다는 사실은 그를 구하지 못합니다. 대원들은 그를 맹세를 저버린 배신자로 여기고 등을 돌립니다. 서약 체계 안에서는 결과보다 서약을 지켰는가가 먼저입니다. 반대로 무협에서 협객이 문파의 규율이나 강호의 관례를 깨고 약자를 구하면, 이야기는 대개 그 행동을 배신이 아니라 협의 증거로 받아들입니다.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보다 무엇을 위해 어겼는지가 먼저 물어지는 겁니다.
두 체계 모두 자기 방식대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정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명분을 앞세우다 보면 협의 실질은 사라지고 간판만 남는 경우가 생깁니다 — 협을 말할 뿐 행동은 따르지 않는 상태입니다. 기사단도 자기 방식의 함정이 있습니다. 부당한 명령이라도 서약이 복종을 요구하면, 기사는 양심과 서약 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이 갈등은 서약이라는 틀이 있어야 생기는 갈등이라서, 애초에 따라야 할 서약이 없는 협객 쪽에는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속 없는 협객, 소속에 묶인 기사
이 대비는 소속이 없는 인물을 놓고 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낭인은 문파도 없고 뒤를 봐줄 세력도 없이, 가진 것이라곤 자기 실력과 자기 판단뿐인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낭인 가운데 의를 좇는 유협으로 불리는 갈래가 따로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소속이 아예 없어도 협은 성립합니다. 협은 조직이 인증해 주는 자격이 아니라 개인이 행동으로 계속 채워 넣는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기사는 정반대입니다. 서약이 없는 기사는 애초에 기사가 아닙니다. 기사단을 떠나는 순간 그는 검을 잘 쓰는 사람일 뿐, 더 이상 서약이 보증하던 옳음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정리 — 옳음을 어디서 찾는가
정리해 보면 협객은 매번 다시 증명해야 하는 대신 소속이 없어도 자격을 잃지 않고, 기사는 한 번의 서약으로 자격을 얻는 대신 그 말을 어기는 순간 모든 걸 잃습니다. 저는 이제 무협 인물을 볼 때는 이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먼저 보고, 판타지의 기사를 볼 때는 이 사람이 무엇을 맹세했는가를 먼저 찾습니다. 같은 검을 들고 있어도 옳음을 세우는 방향이 반대라는 걸 알고 나니, 두 장르의 배신 장면이 왜 그렇게 다른 무게로 느껴지는지도 비로소 이해가 됐습니다.